기후가 조금씩 변해 가면서 토론토에도 예전과 다르게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번개가 하늘에 번쩍 거리면 어떤 이들은 그것을 보고 무섭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 모습을 보고 멋있다 아름답다고 하기도 하지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전에 처음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 땅에 오셨던 것과 다르게 어떤 특별한 장소에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날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사람들은 천둥 번개를 보고 다른 반응을 하듯이,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무서워 숨으려고 하거나 기쁨으로 환호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도 그렇습니다. 어떤 이들은 두려워하며 끝까지 마음이 어지럽지만, 다른 이들은 그 순간을 기쁘고 평화롭게 맞아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면서 우리의 죽음이 주님 안에서 기쁘고 평화로운 죽음이 되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큰 기쁨으로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삶이 그것을 희망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삶이 예수님과 같이 배척을 받는 삶이라고 해도 희망이 세상을 향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어떤 일을 당해도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필레몬서 말씀에서 그의 필레몬에게 그의 종이었던 오네시모스를 돌려 보낸다고 하시면서 그를 주님안에서 형제로 맞이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도망쳤던 종을 죽이지 않는 것만해도 다행일 텐데 사도 바오로는 필레몬에게 그 이상의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고 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며 희망하는 사람으로서 주님안에서 모두가 형제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우리도 주님안에서 살아가며 형제 자매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선택을 할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세상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대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가 두려울 것인지 아니면 기쁨일지 결정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형제 자매들을 어떠한 모습에서도 사랑하고 받아들인다면, 그 사랑안에서 우리는 기쁨을 찾을 것이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과의 만남은 그만큼 더 기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워하고 이기주의 모습으로 형제 자매들을 억압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주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과의 만남이 두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그 선택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이라도 주님께서 오신다면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이 항상 주님을 희망하며 기다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악을 행한다 해도 복수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당신을 배척하는 이들 손에 온전히 당신을 내어 놓으신 예수님과 같이 우리도 고통을 피하지 않고 사랑으로 받아드리며 온전히 자신을 내어 놓을 수 있다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의 영혼은 그 찬란한 빛으로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