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오늘 티토서 말씀을 들어보면 사도 바오로는 참으로 바라는 것이 많은 것 같아 보입니다. 나이 많은 남자들과 여자들에게 바라는 것, 젊은 남자들과 여자들에게 바라는 것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가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은 사회에서 사람들이 서로에게 바라는 것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회에서 보면 바라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일 때가 많지만, 사도 바오로는 자신을 위해서 그들에게 특정한 삶의 모습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위한 것이지요. 하느님의 구원의 영광의 은총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백성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다른 이들에게 종이 된 것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쳤기 때문이고, 섬기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의 삶을 닮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면 당연하게 종은 주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종이해야 하는 일은 당연하기 때문에 주인에게 무엇인가를 바랄 수 있는 입장이 아닌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우리에게 서로의 종이 되어야 하고 섬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항상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오로와 같이 먼저 형제 자매들을 그들 모습 그대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이 바라는 무엇인가를 잘 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수도 없이 잘못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지만 그런 모습도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죄가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우리의 나약한 모습도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회개의 삶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일 우리에게 당신에게 사랑받기를 원한다면 어느 정도의 성덕을 갖춰야 한다고 하신다면, 아마 우리 중에는 그 누구도, 세상의 그 누구도 사랑받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성덕의 길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랑이 없이 스스로 그 길에 들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희망이 없는 죽은 목숨인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느님께 무엇을 바라며 그것을 채워 주셔야 사랑하겠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것이지 무엇을 해주고 안해주고에 달린 것이 아니지요. 아이가 부모가 해주는 것에 따라서 부모를 사랑하겠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정말 어이없고 마음 아픈 일이 아닐까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가 바랬던 바라지 않았던 모든 것이 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 삶에 십자가와 고통까지도 우리가 고통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와 일치하기를 원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에는 선물이며 은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좋은 것만 바라지만, 바라기 보다 먼저 우리 삶에 모든 것을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고 응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바라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며 은총인 것이지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주시기를 바라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다면 항상 실망하고, 희망을 잃고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주님을 떠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온전히 주님만을 바라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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