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일행 가운데 있으려니 하고 생각한 요셉과 마리아의 생각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지 않았고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예수님을 성전에 찾았을 때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서 묻고 대답하며 그들을 놀라게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아직 어린 아이가 어떻게 이런 대답을 할 수 있는지 모두 경탄하고 궁금해하며 더 많은 것을 물어보고 싶었겠지요. 그래서 아이가 부모도 없이 혼자 있는데 부모를 찾아줄 생각도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놀라면서도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합니다. 주님의 뜻을 당장 알기 위해서 캐묻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어쩌면 그런 기다림에 익숙해져 있던 분이고 당장 알기 위해서 하느님을 보채는 분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러한 모습은 십자가 옆에 서 계시던 어머니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일 을 보고 믿음으로 그 일에 동참하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시며 기다리시는 것이지요.
그러한 어머니의 모습,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응답은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하는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머니와 같이 우리가 당신의 뜻에 응답하시기를 바라십니다. 기도를 통해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내하지 못하고 많은 것을 내가 원하는 시간에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알 수 없는 주님의 뜻은 원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 버리고 그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정당화하려고 하는 경우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강아지를 훈련시키면 먹을 것이 아무리 눈 앞에 있어도 기다리라고 하는 주인의 말을 듣고 먹을 것에 달려 들지 않고 기다립니다. 왜 기다려야 하는지, 왜 지금 먹고 싶은 때 먹으면 안 되는지 주인이 설명해 주지 않고 알지 못하고, 자신의 본능을 따른다면 먹어야 하는데 주인의 기다리라는 말을 듣고 기다립니다. 어차피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은 하느님께서 기다리라고 하면 성모님과 같이 마음속에 간직하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왜’ 라는 질문을 합니다. 사람은 동물과 다른, 생각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기다린다는 것은 의지와 선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당장 원하는 답이 오지 않으면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답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하느님과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 내 뜻에 맞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모습의 하느님, 즉 우상을 만들고 섬기거나 하느님은 필요 없다고 하며 삶에서 멀찍이 밀어 버리는 것이지요.
어머니께서는 기도하시는 분이었고, 기도를 통해서 언제나 당신의 뜻 위에 하느님의 뜻을 두셨습니다. 우리도 기다릴 수 있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언제나 어떠한 모습이나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뜻이 나의 뜻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어떤 사람도 지금 눈 앞에 1불을 가지기 위해서 인내하고 기다리면 분명하게 나중에 들어올 백만 불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은총을 베푸시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세상의 어떤 물건이나 사람보다도 더 가치 있고 좋은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의 만족을 위해서 세상의 1 불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고,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주님의 뜻을 기다릴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당신 자녀들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시는 어머니께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시고 주님께 이끌어 주시기를 청하며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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