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은 많이 억울했을 것입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모든 것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심한 고통중에 있었고, 친구들 마저 그에게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라고 하며 회개하라고 다그쳤습니다. 그래서 이유를 알 수 없던 욥은 하느님께 부르짖었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 전 까지 그는 계속 억울하다는 생각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이유를 설명하시기 보다 당신은 그가 알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지혜로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 어떤 사람의 생각보다 위대하고 그 영광을 알 수 없는 하느님 앞에서 욥은 자신을 낮추며 하느님께 자신의 고통의 이유를 알려 달라고 요구하던 자신의 모습을 회개합니다.
그러한 욥에게 하느님께서는 고통의 이유는 말씀하시지 않지만 모든 것을 두배로 돌려 주시며 그의 믿음에 대한 보답을 해 주십니다. 그런데 만일 욥이 계속해서 잘못이 없는 자신을 내 세우고 정당화 하며 자신이 알 수 있도록 설명해 달라고 우기고 버텼다면 아마 회개는 없었을 것이고 자신의 친구들과 다를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짓지 않는 것보다 회개를 원하십니다. 물론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것은 아니지만 회개하는 삶은 죄를 짓는다고 해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삶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코라진과 벳사이다에게 당신의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하시듯이, 죄를 뉘우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삶이 불행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도 부유한 삶 안에서 깊은 죄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좋아해 주기를 원했고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노력했고 실제로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전쟁에 나갔다가 포로로 잡혀서 고생을 했지만 그러한 일도 그의 모습이 변하도록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나섰다가 하루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꿈에서 하느님께서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 그런 결정을 한 것이지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전쟁에 참여한다고 나갔다가 하루 만에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많은 이들은 그를 겁쟁이라고 손가락질 하며 웃고 비난했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에 들고 싶어 했던 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낮춤이 그의 변화된 삶의 시작이었고, 물론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변하지 않았지만 깊은 회개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삶, 세상의 것에 의지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많은 친구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느님께 그는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고, 자비를 베푸신 하느님께서는 그를 진정으로 행복한 삶으로 이끌어 주신 것이지요. 그리고 그 길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우리도 우리 가운데 계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해 불행하고 싶지 않다면 자신을 낮추는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내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도록 그 은총에 마음을 열어 드려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길은 겸손의 길 밖에는 없습니다. 물론 프란치스코 성인의 예전의 삶과 같이 방탕하고 죄에 깊이 빠진 삶이 아니라고 해도 겸손을 통한 회개만이 진정한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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