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을 보면 요한의 두 제자는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라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 갑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요한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보면 이제 당신께서 묵으시는 곳을 돌아가고 계신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 그 때가 오후 네 시쯤이었다고 하는데 애매한 저녁시간이지요.
물론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오후 4시라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의미 같은 것을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퇴근하는 시간이기도 할 것이고, 또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여름 4시는 골프 fee 가 싸지는 Twilight 이 시작하는 시간이라 운동을 하러 가기도 할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출근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4시라는 이 시간이 예수님과 당신을 따라온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왜 중요했을까요? 만일 중요하지 않았다면 굳이 복음서에 그 시간을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시대에는 사람들은 모든 곳을 걸어 다녔습니다. 지금 같이 차를 가지고 가거나, 아니면 우버나 대중 교통을 이용해서 원하는 데로 원하는 시간에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에 어디를 가게 되면 저녁이 되면서 어두워지기 때문에 그곳에 머물러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어디에 멀리 나와 있다가 이제 집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다른 곳이나 그곳에 머무르는 것을 결정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디서 묵고 계시냐고 그 시간에 묻는 것은 이제 다른데 가서 다른 일을 할 시간이 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디서 묵고 계시느냐가 아니라 어디로 가시냐고 물었겠지요.
그래서 오후 4시라고 말하는 것은 어디에 묵고 계시냐고 질문한 요한의 제자들에게는 와서 보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결정을 해야 하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머물며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계속해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로 남을 것인지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그날 예수님과 머무르며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그 중에 한 명이든 안드레아는 형인 시몬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머무르기로 한 두 사람의 결정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는 아주 중요한 순간으로 이어진 것이지요.
그렇게 우리들도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모습대로 살아갈 것인지 결정을 해야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크게는 우리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세례를 받은 중요한 결정이 있었지만 그러한 결정은 매일의 삶에서 이루어 집니다. 요한 1서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죄를 멀리하며 의로운 삶을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악마의 자녀로 죄를 선택할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러한 유혹의 시간에 예수님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과 머무르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와서 보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와서 당신과 함께 머물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매일 우리는 그러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우리가 잘 알고 있겠지만 언제나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은 과거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예수님과 머무르고 요한에게 다시 돌아가지 않았듯이 우리도 다시 옛 삶으로, 예전에 따르던 것으로 돌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세상의 눈을 의식하고 이기적인 삶으로 끌리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에게 어떤 박해를 하든 상관없이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순교자들과 같은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미 예수님을 선택한 우리가 세상에 미련을 가지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우리를 선택하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을 오롯이 따를 수 있도록 갈림길에서 항상 주님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의 은총을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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