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지만 사람은 감정의 노예가 될 수도 있고 주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면서 지켜야하는 침묵은 여러가지가 있고 그 중에 하나는 감정의 침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성을 내고 욕을 하는 사람들은 지옥행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왜 이웃에게 성을 내고 욕을 할까요? 감정의 침묵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침묵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와 이웃의 관계는 감정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불안한 관계일 까요? 사람의 감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데 그렇게 변화하는 것에 의지한다는 것은 절대 그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굳은 땅 위에 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감정이 앞에 서면 타협이나 화해는 생각 할 수도 없을 때가 많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없고 미움과 화로 꽉 채워지는 것이지요.
감정의 침묵은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고 살아있기 때문에 분명하게 여러 감정을 느끼지만 감정에 의해서 움직이는 노예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느님 안에서 감정을 일으키는 것들을 바로 보고 판단하며 먼저 사랑안에서 이웃에게 다가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감정의 침묵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이웃과 화해하고 타협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형식적으로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사랑으로 서로 용서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엘리야도 못된 아합 왕과 하느님을 무시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화가 치밀어 올랐을까요? 가르멜 산에서 엘리야는 450명이나 되는 바알 예언자들을 죽여 버리지만 그것은 그의 감정에 의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는 화가 나고 너무나 슬펐겠지만 그러한 감정이 자신의 선택을 좌우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하느님께 의지하며 하느님의 힘으로 큰 기적을 백성들 앞에서 일으켰고, 백성들이 하느님께 죄를 짓 도록 하는 바알의 예언자들이 마땅한 죄값을 치르게 한 것이지요.
그리고 감정이 앞서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엘리야는 죄를 지은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도록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계속해서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느 누가 밉게만 보이는 이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으려고 할까요?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느님과 화해하고 이웃과 화해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감정의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도록 하며 반응하기 보다 사랑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랑한다면 아무리 잘못했다고 해도 어떻게 형제에게 화를 낼 수 있고, 어떻게 그들을 바보, 멍청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형제 자매가 있다면 그 감정을 다스릴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 구하며, 화가 나고 미워도 한발 물러서서 감정이 아니라 감정의 침묵을 통해서 더 깊이, 먼저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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