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랜 시간을 자유를 누리며 살아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유배지에서 처한 상황이나 자유를 억압을 당하는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서 직접 경험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보통 화면으로 보고 들은 것들이지요. 우리는 조금만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하면 자유를 빼앗긴 것처럼 말하지만 정말 자유를 빼앗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다니엘 예언서에서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 가 임금의 신들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결정인지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자신들의 목숨이 임금의 손에 달려 있는데 하라는 대로 하지 않는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니면 힘들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면, 뜨겁게 타오르는 불가마를 보고 어떤 결정을 할 수 있을까요? 그냥 한번 하고 마음으로는 하느님을 섬기면 되지 하고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용기를 주는 것은 먼저 진정한 자유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을 보면 여기저기서 전쟁과 인권을 억압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일들을 보고 사람의 자유, 인권에 대해서 말하는 정치인들과 단체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의 자유가 인간의 힘과 정책 등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물론 사회에서 그런 자유는 정책을 통해서 주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진정한 자유는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해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느님이 아니라 은총으로 일어나는 일에 더 의지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 기적에 더 의미를 두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는 자신들의 대답으로 일어나는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임금에게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그 불 가마에서 살려내든 그렇지 않든 자신들이 우상이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자유를 누렸기 때문에 이 세사람은 우상에 절하는 죄를 짓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자유로운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아무에게도 종 노릇을 한 적이 없다고 하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며 오직 당신 만이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유다인 들은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 자유가 없었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이지요.
죽음과 부활을 통한 자유,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는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감옥에 갇히거나, 움직일 수 없는 병에 걸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해도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의 죄 만이 우리를 얽매고, 노예가 되도록 합니다. 그래서 지금 세상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해도 죄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그리고 희망적인 것은 아무리 죄에 사로 잡혀 있다고 해도 우리에게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언제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죄에 머물기보다 하느님을 선택하며 그 믿음으로 불 가마에 라도 들어 갈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매 순간 크고 작은 일에서 주님을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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