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제가 보좌 때만 해도 장례가 나면 경찰이나 장례 에스코트 해주는 서비스가 있어서 신호에 걸리지 않고 갈 수 있도록 해주기도 했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바뀌어서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그렇게 해서 묘지에 가는 이들이 모두 함께 멈추지 않고 갈 수 있도록 한 것이지요. 아마 예수님 때에도 장지로 향하는 행렬은 그렇게 멈추지 않고 갔을 것이고, 그 누구도 그 행렬이 멈추도록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관에 손을 대시며 그 행렬이 멈추도록 하십니다. 아들을 잃은 과부나 관을 메고 가는 사람들이나 주위 사람들은 아무도 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누구이고, 또 무슨 일인가 했겠지요. 관에 손을 대면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관습에 따라서 부정하게 되셨습니다. 백인 대장의 종을 낫게 하신 것과 같이 그냥 떨어져 서서 말씀으로 하셨어도 그를 살릴 수 있으셨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손을 대며 멈추게 하십니다.
그렇게 사람을 살리시기 위해서 당신이 부정해지는 것을 마다 하지 않으신 모습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기 위해 이웃을 희생하고, 자신이 깨끗해지기 위해서 남이 더러워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당신을 내어 주시는 희생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죄로 죽음의 길에 들어서 있다 해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 것을 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깨끗하지 못한 우리에게 손을 대시고 생명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을 보고도 가던 길을 멈추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안에서 내 갈 길이 바빠서 가까이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앞에서 말씀드린 에스코트와 같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길을 가도록 합니다. 멈추지 않고 길을 간다면, 그 길은 분명히 죽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멈춰야 합니다. 멈추고 예수님께서 당신 은총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도록 한다면 죽음으로 가는 길에서도 생명으로 돌아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 안에서 가는 길을 멈춘 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정해 놓고 아침 저녁으로 기도하는 것이나 어떤 특별한 일이 있거나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기도하는 것은 물론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루 일과 중에 자주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며 하느님께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사도 바오로가 말씀하시는 대로 교회안에서 우리 역할에 충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모든 부분은 머리의 뜻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그와 같이 교회 안에서 움직임은 내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이신 예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주 멈춰 주님을 만남으로서 잘못된 선택이나 길에서 바로 돌아설 수 있는 것이며, 우리가 하는 일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으로 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만의 생명이 아니라 함께 주님의 몸을 이루고 있는 형제 자매들의 생명이기도 합니다.
멈춰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언제나 불러 세우 십니다. 세상에 소음에 듣지 못하 거나 아니면 듣지 못한 척하며 계속 가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고 멈출 때 아들이 살아난 과부의 기쁨과 같이 우리도 큰 기쁨과 평화 안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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