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큰 일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우리는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합니다. 가족 중에 누가 돌아 가실 때가 되었다 거나, 새로운 직장에 인터뷰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거나 또 시험을 보고 결과를 기다리는 등, 어떤 일에 대한 중요한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를 때 마음의 준비를 합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고통이 덜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과 같이 넘어 갈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받아들일 때 좀 더 나은 모습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많은 고난과 지도자들로부터 받을 배척과 죽임,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제자들이 마음의 준비가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당신도 다가오는 고통에 대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했겠지요. 그런데 베드로의 반응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제자들은 그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길을 예수님께서 가시기를 바랬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모두 예수님 곁에서 떠났던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모습만을 고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항상 앞서기 때문에 사회 안에서 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하느님과 관계 에서도 베드로와 같이 하느님이 아니라 내 뜻이 앞설 때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어려운 일이나 고통은 피하려고 하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합니다. 믿음을 실천하는 삶이 아니라,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은 그냥 마음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정작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그와 다를 때가 많은 것이지요. 믿음이 우리 삶에 드러나는 삶은 언제나 주님과 함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했듯이, 그를 따르는 이들도 미워하기 때문이지요.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에서 고통받는 메시아의 모습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는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라고 말합니다.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얼굴은 아마 그 사람의 마음을 가장 먼저 겉으로 표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평화롭거나, 화가나 거나 짜증이 나 있거나, 기쁘거나, 사랑에 빠졌을 때나, 그리고 고통 스러울 때도 보통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 느끼는 감정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얼굴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시면서 여러가지 감정을 보이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메시아가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는 말은 그런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큰 고통과 미움 앞에서도 변함없이 꿋꿋하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우리는 반응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흔히 말하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고 해도 십자가의 고통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다가오는 무자비한 고통 앞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아버지께 이 잔을 마시지 않게 해달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고통도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변하도록 하지 못했습니다. 변하지 않는 차돌과 같이 어떠한 고통도 아버지와 인간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변하도록 하지 못한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며 아버지의 뜻을 반대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하십니다. 금방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지만 바로 다시 사람의 생각에 치우치는 베드로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여주셨고, 우리에게 원하시는 변하지 않고 흔들림 없는 꿋꿋함이 부족합니다. 신앙을 고백하고 살아가는데 있어서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데, 얼굴 표정이 시시 때때로 변하듯이 우리의 믿음도 그러할 때가 많습니다. 다시한번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믿음은 실천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실천은 물론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형제 자매들을 보살피고 용서하는 사랑의 모습이지만,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으로 자녀들을 키우신 부모님들이 잘 아시겠지만, 부모의 역할이 언제나 아이들을 위한 희생이 따르듯이, 그 누구를 향한 사랑이라도 언제나 희생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가볍지 않으며 큰 고통이기도 합니다. 언제 어떻게 우리의 믿음이 세상의 도전을 받을 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며, 예수님의 사랑안에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나중에 또 배신을 하며 알게 되었듯이 우리의 힘으로 사탄의 유혹을 이겨낼 수 없고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예수님의 사랑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사야서 에서 메시아는 어떠한 세상의 고통과 모욕을 받아도 하느님께서 도와 주시기 때문에 수치를 당하지 않고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십자가형은 수치스러운 형벌이고 부끄러운 형벌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수치스러움과 부끄러움은 세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세상의 일만 생각하는 죄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바로 진정한 수치스러움이고 부끄러움인 것이지요
지금 신앙인으로서 삶에 특별한 어려움이 없고 평화롭다고 생각 할 수 있지만 지금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거나, 도움을 요청하는데 내가 피해를 볼 까봐 망설이고 있거나, 기도하지 않고 하느님이 내 삶에 첫번째가 아니라면 분명히 어려움이 찾아오거나, 세상이 내 믿음에 도전해 올 때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의 마음을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고 살아가려고 할 때 우리의 마음이 차돌과 같이 되어 변하거나 흔들리지 않도록 해 주십니다. 그렇게 할 때 진정한 기쁨이 있는 것이고 주님의 사랑으로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는 실천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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