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머나먼 캐나다에 살기 때문에 한국에 사는 친척들과 친구들, 부모님, 형제 자매 등을 자주 만나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요새는 비행기 값이 비싸고 자리가 없어서 더욱 힘듭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언제나 보고 싶은 간절함이 있습니다. 그 간절함이 클수록 만났을 때의 기쁨도 큰 것이지요. 하지만 별로 그렇게 보고 싶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당연히 만났을 때의 기쁨도 그만큼 적을 것입니다.
오늘 아가의 말씀에서 연인을 보기 위해서 산을 오르고 언덕을 뛰어 넘어와 만나고 싶은 마음에 기웃거리는 이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그 연인 사이에 만나이 이루어 졌을 때 얼마나 큰 기쁨이 그들을 채울 까요? 아가서의 말씀은 하느님과 당신의 백성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보시고 크게 기뻐하시며 우리도 사랑하시는 이 와 만남에서 큰 기쁨을 누린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쁨이 오늘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과 요한의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그 기쁨을 말하고, 아직 어머니 뱃속에 있는 요한은 그 안에서 뛰놀며 하느님과의 만남을 누구보다도 기뻐합니다. 얼마나 하느님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으면 그렇게 기뻐할 수 있을까요? 과연 우리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그렇게 기뻐하고 있을까요?
엘리사벳과 요한의 경우를 보면 그들이 기뻐하는 것은 인간 적인 어떤 것이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들 안에서 기뻐하시는 것이지요. 성령의 기쁨은 우리가 성령의 활동을 방해하지 않을 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세상에 의지하거나, 어려움과 고통 안에서 걱정과 절망으로 마음을 채울 때 성령의 활동에 많은 장애물을 만들어 버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고통안에서도 좋은 것을 꺼내 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면 결국에 우리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하지만 믿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어려움과 고통을 없애려고 하는 노력은 슬픔과 절망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울 수밖에 없습니다.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갈지 우리의 선택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 그리고 요한이 하느님을 만난 것은 그들이 원하는 모습의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신 모습으로 만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만남이 생각하지 못했던 모습이었어도 큰 기쁨이었던 것이지요. 우리도 하느님을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은 여기 계시다 아니면 어떤 모습이다 하면서 정해 놓고 그 곳이나 그 모습으로 만나려고 한다면 아마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와 하느님과의 만남은 하느님의 뜻대로, 당신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힘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지금도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평화가 없고 서로 미워하고 다투며 기쁨이 없는 삶의 연속인 것이지요.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을 마음을 다해서 간절히 바래야 합니다. 하느님만을 바라며 살아갈 때 성체안에 계시는 하느님, 기도중에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하느님을 뵐 때 우리의 마음은 기쁨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어떤 고통과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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