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상은 말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하지만 사실 본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하게 차별하고 있고, 살아서 숨쉬고 있다고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안락사를 합법화하고 부추기는 것은 겉으로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미 세상에서 가치가 없기 때문에 죽어도 된다고 사회가 허락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가 적극적으로 고통안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들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도록 도와주려고 하지 않고 쉽게 해결하는 방법만 앞에다 내세우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네덜란드에서 얼마전에 육체적으로 아무런 병도 없고 죽음에 가까지 가지도 않았던 20대가 정신적인 고통만을 이유로 해서 안락사로 죽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지만 이제 한번 이런 경우가 생겼기 때문에 아마 다음 사람에게는 더 쉬울 것이고 아마 캐나다도 이미 그 뒤를 따라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 죽고 싶으면 죽여주는 세상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 와서 부활에 관해 논쟁하는 사두가이들과 같이 이 사회는 산다는 것에 대해서 크게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 생명의 가치는 하느님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것도 하느님께 모두가 똑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가 사회에서 지위가 높기 때문에 더 사랑하시고, 아니면 병이 들어 사회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 자신들의 가치를 떨어뜨리면서 하느님께 죄를 지으며 돌아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하시며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라고 하시는 것과 같이, 살아 있다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과의 관계안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도 자신과 그리고 함께 있던 이들을 공격하는 이들에게 저항하지 않고 함께 죽음을 맞이하면서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은 주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라고 보여 주셨습니다.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은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티모테오 2서의 시작을 들어보면 사도 바오로는 수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갇혀 있었지만 그의 편지에는 전혀 그런 자신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오로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다른 이들에게도 그리스도를 따르며 찾아오는 고난을 피하지 말고 자신과 함께 동참하라고 말합니다. 그때도 그랬겠 지만 지금 사회에서는 감옥에 갇혀 있는 이들을 같은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감옥에서 나와서 다시 사회에 들어가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이미 사회가 보는 눈에 그 사람은 자신의 범죄로 인해서 가치와 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감옥에 있는 이들을 찾아가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도 다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 하느님께 똑 같은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살아있기 위해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과 관계 안에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믿음 때문에 미움을 받고 고난을 받을 수 있고, 또 병이나 어떤 이유로 사회가 생각하는 살아 있는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한다고 해도,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을 찾고 그 사랑안에 머물면 그 누구보다도 더 살아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은 사두가이들이 말하는 방식의 사회에서의 삶의 연장이 아니라, 하느님과 완전한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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