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많지만 모든 것을 다 가지거나 다 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너무나도 간절히 원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가지거나 일을 해 내려는 것도 있습니다. 얼마나 원하는 가에 따라서 우리가 하는 노력에 차이가 분명하게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갓난 아기의 경우를 보면 배가 고플 때 아기는 그냥 엄마가 젖을 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거나, 줘도 그만 안 줘도 그만이라고 하면서 가만 있지 않습니다. 배를 채우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울어댑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바르티메오와 같습니다. 사람들이 무시하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지가 온 힘을 다해서 예수님을 부르며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합니다. 다시 볼 수 있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그 모습을 상상해 보면 얼마나 불쌍하고, 간절해 보일까요? 그는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누가 그러한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지 분명히 믿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온 힘을 다해서 불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했다고 하시고 바르티메오는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신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거지지만 믿음만은 그 누구보다도 더 충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찾고 있습니까? 몸에 좋지 않은 것으로 군것질을 많이 해서 배가 고프지 않아서 예수님을 간절히 찾을 이유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처지가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 한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앞을 볼 수 없는 처지를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부르지 않고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이고 육적인 욕망들과 싸우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를 지을 이유가 없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싸움 중에 있고 자주 그 싸움에서 집니다. 보통 내가 할 수 있다, 아무런 도움도 필요 없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눈이 멀어서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을 멀게 하는 것은 물론 여러 형태의 죄가 있습니다. 그런 죄 들이 우리가 영적 집을 짓기 위해서 하느님께 선택된 값진 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습대로 자신의 감정에만 휩싸여, 악인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악인이 되어 하느님께 눈을 감아버리고, 예수님께서 가까이 계시고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실 수 있는데 청하지 않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자신의 세상에 갇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그만큼 하느님이 삶에 간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채우는 물질 적인 것과 감정적인 것들로 영혼을 꽉 채워 버려서, 몸에 좋지 않은 음식만 먹어 몸을 망치듯이, 영혼을 망쳐버리는 것이지요.
바르티메오는 거지라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완전히 비워 있는 상태였지요. 그 비움이 예수님을 자신의 삶으로 환영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드린 것과 같이 세상에서 채우고 있는 것을 비우지 못하면 하느님을 향한 간절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물질을 향한 침묵, 감정의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자신의 욕망과 감정에 휘둘려 사는 모습에서 욕망과 감정을 자제하고, 그러한 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것으로 변하게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바르티메오는 감정에 휘둘려서 조용히 하라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예수님을 불러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이 믿음으로 하느님을 향하게 했고, 그러한 것이 바로 감정의 침묵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찾는다면 바르티메오에게 우리를 위해 그와 같이 될 수 있도록 전구해주시기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비천함과 간절함이 주님을 향한 믿음이 되어 주님께서 우리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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