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완전하다고 하는 것은 흠이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완전한 것은 기준이 애매 합니다. 또 완전함은 무엇을 가지고 말하는지에 따라서 그 모습이 다를 수 있습니다. 어찌 되었건 사람에게 완전함은 이세상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것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한다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회사에서 상사가 직원에게 일에 대한 완전한 해결이나 완전한 완성을 요구할 수 있을까요? 자신도 할 수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에 완전하지 못하다고 해서 다그치거나 나쁘게 대한다면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없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완전해 지라고 하시는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그 완전함의 길은 우리가 알아서 찾아내고 걸어야 하는 길이 아니라 이미 당신께서 걸으신 길을 우리가 따라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완전함은 어떤 도덕적인 완전함, 한치의 죄도 짓지 않는 완전함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랑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완전함 이기 때문이지요.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은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드러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완전함을 추구하는 삶은 주님의 은총을 통해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구든 구분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 하느님께서 죄인이나 선인이나 똑같이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우리도 형제 자매들을 그렇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쉽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어떠한 완전함 보다도 더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길은 주님과 함께 하는 길이며,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보여주신 길이기 때문에 자신이 주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그 무엇보다도 원한다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이웃을 예수님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과연 우리가 무엇보다도 원하는 것일까요? 나에게 잘못한 이를 상대로 인내하고 용서하는 것이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무엇보다도 원하는 것일까요? 지금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아합과 같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정말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오직 다를 수 있는 길은 가지는 것으 아니라 내어주는 사랑인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차별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차별하지 않고 누구라도 사랑하는 길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완전함 입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그러한 사랑을 하려고 한다면 주님의 은총은 분명히 우리를 더욱 당신의 완전함에 가까이 다가 갈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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