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사실 예수님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저 착한 일 좀 하고, 이웃을 돕고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살아가면서 기도 좀 하면 그것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성당에 가지 않아도 혼자 기도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이 있지요.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어떤 이론이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생각을 우리 안에 심어 주시기 위해서 이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제베데오의 두 아들,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그 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 야보고 사도의 유해가 있는 대성당을 향해 길을 가는 까미노를 생각해보면 직접 걷는 까미노와 들어 보거나 유투브나 티비로만 본 까미노는 다릅니다. 갔다 온 사람이 아무리 설명을 해도 직접 걸으며 체험하기 전에는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당신이 마시려는 잔을 마셔야 당신을 알 수 있다는 맥락이 아닐까요? 당신께서 가신 길을 직접 걸어 봐야 그들도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당신을 따르는 삶이 어떤 삶인지 알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마신 잔을 마셔야 한다는 것은 당신과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고, 목숨을 내어 놓고, 희생하고 원수 까지도 사랑하는 그 사랑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사도들 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셔야 하는 잔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 그 잔을 안 마실 수 없습니다. 피하며 자신의 입에 단 것만 마시려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하지 못하고 동 떨어진 삶이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 희생의 잔을 마시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우리는 나약한 질그릇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도망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 엄청난 보물을 가지고 있고, 어떤 것도 가능하게 하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그 힘에 의지했을 때 아무리 쓴 잔이라고 해도 사도들을 비롯해서 많은 성인들은 그 잔을 마시며 예수님과 일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삶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까미노 길도 예수님을 모르는 야고보였다면 처음부터 그런 길이 없었겠지요. 하지만 그의 삶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예수님께 향하는 길이기 때문에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람들이 그 길을 걸은 것입니다.
나는 약해서 예수님께서 마신 잔을 마실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겸손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르면서 잔을 마시겠다고 했듯이 우리도 어떤 모습이 될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마신 잔을 마실 수 있다고 한다면, 주님의 힘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예수님과 일치하며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길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사도직을 수행하는 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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