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자 요한과 같이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 어떤 일을 두려워하고 좋아하는가 등 많은 부분을 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한 것만으로 자신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다른 형제 자매들과 관계는 진심이 되기 어렵습니다. 상대방에게 진실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진실된 모습을 알아야 관계가 이루어지는데, 자신을 잘 모른다면 겉모습만으로 이루어지는 얕은 관계는 이루어질 수 있을지 몰라도 진실된 깊은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당신은 누구요?’ 라고 질문하는 이들에게 자신은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나 다른 예언자도 아니며 이사야 예언서의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이며, 자신은 뒤에 오시는 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하며 자신을 분명하게 알 수 있던 것은 바로 자신을 예수님에 비췄기 때문입니다. 거울이 우리의 모습을 머리카락 하나도 온전히 그대로 보여 주듯이, 우리가 세례자 요한과 같은 겸손으로 예수님 앞에 설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본래 모습을 그대로 비춰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겉 모습만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을 비춰주는 거울이며 그 관계를 통해서 자신을 알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 대 바실리오와 성 그래고리오는 주교로서 양들을 가르치는 일에 충실 했고 무엇보다도 아리우스라는 이단에 맞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주교의 직분에 충실 할 수 있었던 것은 지식이나 학문을 쌓아 올렸기 때문이 아니라 두 분다 긴 시간을 홀로 은둔생활을 통해서 깊이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며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깊어 갈수록 자신을 그만큼 더 잘 알게 된 것이지요.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을 통해 비춰지는 자신의 이미지를 흐리게 하는 것이 적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잘 알았기 때문에 이단과 싸움에서 많은 고통이 있었지만 물러나지 않고 참된 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요한 1서에서 거짓말쟁이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말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할 수 있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알 수 없고 자신을 알 수 없는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고 진실된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의 말을 여러분은 과연 믿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겸손으로 충실한 기도 생활, 깊은 기도 생활을 통해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솔직하게 비춰지는 우리의 모습이 두려울 수도 있기 때문에 기도하려고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사회에서 가면으로 진실된 모습을 숨기고 살고 있다면 더욱 그렇겠지요. 하지만 용기를 내서 주님 앞에 나아가면 그러한 가면이 있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앞에 올 때 그 가면 뒤에 숨겨진 모습을 우리에게 비춰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모습을 받아들일 때 주님과 진실된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고, 나아가 형제 자매들과 관계도 진실된 관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두 성인과 같이 우리가 은둔 생활을 하지 못하다고 해도 매일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성당이나 어디에 가서 몇 시간씩 하는 것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자주 잠시라도 당신을 찾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간이 없어서 기도하지 못한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지요. 다시한번 기도는 주님을 알고 주님께 비춰진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자신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잠시라도 마음을 다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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