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서 당신을 팔아 넘길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유다는 예수님께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습니다. 뻔뻔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하는 일을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이유로 정당화하고 있었는지 모르는 일이지만 아무튼 유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한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그를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만큼 불행하다고 하시며 그의 죄가 얼마나 큰지 말씀하시지만, 유다의 선택으로 예수님께 주어진 큰 고통을 통해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졌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모든 이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유다가 잘했다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감사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유다는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그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유다를 잃는 것이 예수님께도 마음이 아픈 일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을 팔아 넘기려고 하지만 그도 당신이 사랑하는 제자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당신이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다를 위해서 그가 배신을 하지 않기를 원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를 잃는 고통이 십자가의 고통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형제 자매들의 선택에 의해서 고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특히 잘 아는 사람들, 가까운 사람들에 의해서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고통을 받으신 분들이 분명히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 자매들을 미워하게 되고 관계를 끊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단순하게 내가 당했기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 자매들과 관계가 깨지는 것을 더 고통스러워 해야 합니다. 형제 자매들이 자신들의 죄로 인해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는 것을 고통스러워 해야 하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가 그런다고 해도 유다가 자신의 갈 길을 멈추지 않고 갔듯이 형제 자매들이 우리의 사랑을 알아주지 않고 응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움속에 남아 있다면 우리의 고통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쓰여 질 수 없는 것이지요. 아무리 미워해도 어차피 고통은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데 아무런 가치도 그 안에서 찾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요? 그만큼 고통만 더 심해지는 것이지요.
우리의 고통이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가치가 있는 것은 우리가 그 고통을 통해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신 것과 같이,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을 끝까지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것과 같이 고통을 주는 이들을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할 때, 그 고통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이 당신의 사랑의 길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아무리 잘해도, 아무리 조심하고 사람을 가린다고 해도 이웃의 선택으로 오는 고통을 완전하게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서 피할 방법을 찾기 보다 그런 고통이 찾아왔을 때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를 위해 고통을 피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배워야 하고, 그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는 기도와 말씀안에서 주님 가까이에 머무르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 이 아닌 다른 데서 그러한 사랑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런 길이 있다고 한다면 다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랑하는 제자가 주님 곁에 있었던 것과 같이 주님 곁에 머물며 그 사랑을 배우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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