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는 보통 사람을 그 과거를 보고 판단을 합니다.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갔다 온 사람들은 그 과거 때문에 사회에서 보통 시민들과 같이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과거에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 일 때문에 그 사람과 멀어지는 경우도 흔합니다. 회사에 취직을 하려고 해도 무엇보다도 과거가 중요합니다. 성당에서 봉사를 하는 것도, 특히 노약자들을 상대로 하는 봉사를 하려면 background 첵크를 해야 하는데, 그것도 범죄를 지은 적이 있는지 대해서 그 사람의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이지요. 이 외에도 아마 다른 경우들도 많이 있을 것이고, 아무튼 많은 경우에 과거가 현재의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 있지요. 또한 다른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도 자신의 과거에 매여 있으면서 자신을 판단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의 과거를 보시고 지금의 나를 판단하신다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회심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반대로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아주 반듯하게 신앙 생활과 사회 생활을 해왔다면 과거가 좋기 때문에 지금은 대충 살아도 하느님께 인정받겠지요. 그러한 하느님이시기를 원하시는 분이 있을까요?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사도로 불릴 자격도 없는 교회를 박해했던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 자신이나, 아니면 그가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이들이 그러한 사도 바오로의 과거를 보고 그를 판단했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 바오로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과거에 매여 있지 않았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과거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을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모습을 보고 그의 복음선포를 들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는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씻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바르는 여인을 그녀의 과거를 가지고 판단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의 과거를 알았다면 손을 대지 못하게 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 여자를 예전의 죄를 가지고 판단하지 않으시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현재 모습을 보시고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십니다. 과거를 따졌다면 바리사이의 말 대로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하셨겠지요.
하느님께는 과거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짓고 온갖 악행을 행했다고 해도, 지금 회개하고 새로 태어났다면 그 모습을 보시는 것입니다. 물론 아무리 잘 살아왔다고 해도 지금 악행을 행하고 있다면 하느님께서 보시는 모습 또한 그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한 하느님과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형제 자매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의 과거를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든 그들의 현재의 모습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선을 행한다면 과거를 묻지 말아야 하고, 좋은 사람이었지만 지금 악을 행한다면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악행에서 돌아설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회심을 하고 돌아선 사도 바오로와, 오늘 복음에서 죄를 뉘우치며 회개한 여인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우리를 위해 전구해주시기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판단하지 않으며 먼저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을 주님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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