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이 말씀에서 “나” 라는 단어는 하느님께서 불타는 떨기 나무에서 모세와 만나시며 모세가 이름을 물었을 때 하느님께서 “나는 있는 나다.” 라고 대답하실 때 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유다인 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예수님께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한 것이지요. 사람이 하느님과 같다고 하는 것보다 더 큰 죄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시는 아드님이시며 한 하느님이시지만, 사람으로 이세상에 오셔서 당신께서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는 것은 당신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많은 경우 그 일치의 기준을 자신에게 둘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에서도 서로 자신의 기준이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고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해 주셔야 관계가 성립되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믿는다고 하다가 큰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큰 실망을 하며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들어주지 않으시기 때문에 함께 하는 삶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유다인들도 그렇게 자신들의 기준으로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서 메시아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다고 하시는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인데, 하느님 마저도 자신의 기준으로 만들어 놨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느님께서 내 말을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며 그에게 새 이름을 주셨듯이, 우리도 세례 때 하느님과 계약을 맺으며 당신께서는 새로운 이름을 주셨고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은 그의 후손들이 모두 지켜야 하는 것과 같이 우리도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모든 것은 주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물론 자신들이 살아오고 믿어온 것이 있기 때문에 처음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겸손하지 못했고 자신들의 뜻을 내세우기 바빴기 때문에 그것과 다른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말씀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아무리 당장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주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살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도 먼저 자신의 뜻을 얘기하다 끝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먼저 듣고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고통의 길이라고 해도,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며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과 같이 우리도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의 은총을 청하며 다 함께 미사를 봉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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