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복음사가는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함께 바오로의 첫 번째 전교 여정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어려움에 부딪히자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두고 혼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복음사가 이기 때문에 믿음이 깊고 용감하며 모든 어려움도 잘 이겨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언제나 충실 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보통 지금 사회에서 어려움 때문에 동료들을 버리고 혼자 도망 쳤다면 아마 용서받기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죄책감도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죄책감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게 되겠지요. 하지만 마르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고 다시 마음을 잡고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를 도우며 복음을 쓰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마르코의 나약함을 통해서도 당신의 구원 사업에 중요한 일을 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잘하지 못할 때 주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한 잘못된 선택이나 부족함도 다 하느님의 계획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아닌 것 같아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1서의 말씀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실수나 잘못 판단하고 행동했기 때문에 더 이상하지 못한다고 하며 포기해 버리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진정한 겸손,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은 비록 우리가 나약하고 죄가 많지만 그런 우리도 당신의 뜻대로 써 달라고 모든 것을 주님의 자비에 의지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겸손한 이들에게 베푸시는 은총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은총안에서 삶은 마르코 복음의 말씀대로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표징이 따르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시대에는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를 말하며 독을 마셔도 해도 입지 않으며 병자들을 낫게 하는 표징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표징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할 수 있고,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더 이상 표징을 일으키시지 않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특정한 사람들을 통해서만 표징을 일으키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 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 표징을 일으키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때에 필요한 표징들을 일으키시는 것이 아닐까요? 꼭 사람들이 놀랄만한 어떤 대단한 일 만이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표징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려고 하는 것만 보지 말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이지 보려고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무엇을 하시는지 우리는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표징이 일어날까 하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러한 삶 안에서 주님의 사랑에 의지하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형제 자매들의 삶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고 내가 비록 알지 못한다고 해도 주님의 표징은 분명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삶을 살아가며 주님의 복음을 충실히 선포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말씀대로 굳건한 믿음으로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는 악마에 대항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눈에 보이는 표징이 아니라 먼저 은총안에서 충실한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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