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회에서 살아가다 보면 어떤 이유에서 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반듯하고 좋은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좋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람들은 어떤 사람의 말이 옳든지 그렇지 않은지를 떠나서 자신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형제 자매가 옳은 말을 하면 듣고 생각해봐야 할 것도 일단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싫어하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에서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는 아모스는 정말 싫어합니다. 아모스가 하지도 않은 말을 가지고 그를 고발하며 쫓아내려고 하지요. 그것은 아모스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원해서 예언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양떼를 몰고 가는 자신을 붙잡으셨다고 합니다. 즉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셔서 이스라엘의 잘못을 지적하고 회개하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제 아마츠야에게 그가 어떻게 될 것인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마 아마츠야는 더욱 아모스를 싫어했을 것이고 아마츠에 대한 예언은 나중에 이스라엘이 유배를 가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중풍 병자를 보시고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율법 학자 몇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들을 향한 직접적인 말씀은 아니었지만, 자신들이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있었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나 하시는 행동들이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정도로 미워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냥 가만히 두고 보시는 것이 아니라 특히 형제 자매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무조건 내가 듣기 싫은 말이라고 해서 내치고 그 말을 전달하는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어 놓고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닫아 버린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 아모스와 같은 예언자, 하느님께서 부르셔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모스와 같이 사회에서 보잘 것 없는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기쁘게 해주시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머무르시며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서 악을 이기고 구원의 영광에 들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우리가 듣고 싶어하는 말, 좋아하는 말만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형제 자매들의 모든 말이 다 하느님의 목소리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분별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하는 것이고, 분별하기 위해서는 일단 판단하지 않고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들으려 하지 않으면 분별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별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을 통한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가 이웃을 미워하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분별하여 우리의 구원과 형제 자매들의 구원을 위해 바른 길로 나아 갈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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