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사랑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 인지 잘 알지는 못하지요. 오늘 사도 바오로가 말씀하시는 사랑에 대해서 들으면서 아마 모두가 ‘그래 이것이 완전한 사랑, 진정한 사랑이다.’ 라고 생각은 할 수 있지만, 정작 모든 사람들과 관계 안에서 살아가지 못합니다. 또한 사랑은 일정한 사람만을 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하느님 사전에는 그런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감정으로 하는 사랑이라고 하면 당연히 사람을 가리고 차별합니다. 하지만 감정이 전재가 아니기 때문에 모두를 사랑하는 것,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아무래도 마음안에 자신이 너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말도 듣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도 듣지 않는 이들을 보면 그러한 모습이 보입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분명히 그 안에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은 하느님도 이웃도 아닌 자신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손가락질하고 좋아하지 않지만, 사실 자신을 솔직히 돌아보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듣는 척은 하지만 나중에 보면 살아가는 모습은 결국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행동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당신을 내어 놓으시며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물론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우리가 사랑이신 하느님을 온전히 다 알 수 없고 부분적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같은 사랑을 온전히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계속되는 것은 우리 삶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자라나도록 노력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랑이 커지면, 다시 말해서 내 안에 하느님과 형제 자매들이 자리가 커진다면 지금 완전한 사랑을 하지 못한다고 해도 실망하거나 좌절, 또는 포기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더 진정한 사랑하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사랑이 커지기 위해서 말씀들 듣고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흘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그 사랑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자신을 향한 마음이 없어질 때 까지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문을 열어 들이면 그 자리에 들어오셔서 당신이 아닌 것을 밀어내 주십니다. 물론 한번에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 갑자기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서서히 당신의 자리를 넓혀 가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바위와 같이 단단하던 마음도 당신의 사랑안에서 서서히 녹아 내릴 수 있는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라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말씀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