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대도시에 가서 기차를 타거나 전철을 타고 가다 보면 기차나 기찻길에 있는 벽 등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칠해 놓은 벽 낙서 들이 많이 보입니다. 갱 들이 자신들의 구역을 표시하기 위해서 든, 어떤 이유에서 든 공공 장소에 그런 낙서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 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모이거나 지나가는 곳에서도 여기저기 그런 것들이 많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장소에 따라서 보기 좋지 않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빨리 없애는 곳도 있지만 경비가 많이 들고 하기 때문에 그냥 두는 곳들도 있습니다. 아무튼 보기가 좋지 않은 풍경이지요.
이러한 낙서들을 없애는 방법 중에 가장 좋은 것은 물론 그 낙서를 화학약품을 사용해서 지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 위에다 페인트 칠을 하기도 하지요. 제 기억으로 얼마전에 블루어 길을 운전하고 가다가 기차길 밑으로 그런 곳을 봤습니다. 아직 페인트 칠을 하다가 말았는지 벽 낙서 위에 흰색 프라이머나 페인트가 대충 칠해져 있던 모습이었지요. 그런데 완전히 지우지 않고 위에다 페인트를 칠하면 그 벽에 있는 낙서를 완전히 지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다시 보인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밖에 있기 때문에 햇살과 비와 여러가지 환경 조건에 부딪히며 페인트가 영구적이지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아예 지워 버리지 않는 이상 시간이 지나면 페인트를 칠하고 또 칠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고 죽으신 후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죄에서 벗어나는 회개를 통해 생명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해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사랑을 통해 자신의 죄를 알게 되고 그 죄에서 돌아서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회개는 우리가 지은 죄를 그냥 페인트로 벽 낙서위에 칠하듯이 겉만 깨끗하게 보이기 위해서 우리 죄위에다 깨끗한 페인트를 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아무리 칠을 해도 그 죄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 보이지만 않을 뿐 그대로 남아 있고 이 세상 삶에 이리저리 부딪히다 보면 언젠가는 다시 그 지저분한 모습을 겉으로 드러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실 때 그냥 죄를 보이지 않게 덮어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에서 백성들에게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완전히 보이지 않게, 흔적도 남지 않도록 지워 버리는 것입니다. 벽 낙서도 돈이 더 들고 힘이 더 들지만 흔적도 없이 완전히 지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회개도 그냥 덮어 버리고 사는 것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회개 하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영혼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수 없도록 완전히 지워 버리시는 것이지요.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세례 성사와 고해 성사를 통해서 베푸시는 은총인 것이고 우리가 회개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하는 은총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덮어 버리기만 한다면 죄의 무게는 점점 더 무거워질 것이고 우리는 결국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겉 모습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면의 삶부터 하느님을 향해 완전히 돌아서는 것입니다. 옛 죄의 무게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우리가 하느님께 다가가려고 하는데 가지 못하게 붙들고 있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베드로 사도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메시아까지 죽인 죄도 회개하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지워 주신다고 하시는데, 우리가 지은 죄 중에 과연 하느님께서 지워주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만일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그냥 보이지 않게 덮어 버리기만 하는 죄일 것입니다.
요한 1서의 말씀대로 죄를 짓지 않도록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그것은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주님과 대화하는 삶입니다. 물론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세우신 계명도 사랑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다 마음에 든다 거나 쉽다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계명에 충실하기 위해서 수많은 고통을 당했고, 그러한 고통들을 기쁘게 받아들였을까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십자가의 고통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죄를 멀리하려고 노력하고 당신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나약함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예수님의 희생이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의 나약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 위해서 제물로 바치셨고 우리를 위해서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그렇듯이 누군가를 변호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누구 보다도 우리를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대하시는 모습에서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사실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가장 힘든 순간에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 모두 예수님을 버렸기 때문이지요. 그러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뿐 아니라 제일 먼저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 입니다. 그 말씀에는 분명히 그들의 잘못을 탓하지 않고 용서하시며 새로운 용기를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당신을 바로 알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이 죄인인 우리를 대하시는 모습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과 같이 화내고, 탓하고, 복수하거나 관계를 끊어 버리지 않고, 더 깊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바로 죄인의 회개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지요.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나약함, 우리의 죄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나약함과 죄는 더러운 것을 피하는 사람들과 같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피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 가까이 다가오시게 합니다. 우리는 형제 자매들의 지저분한 것이 우리에게 닿는 것을 싫어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의 모습 마저도 사랑하시는 것이지요.
그러한 사랑을 믿는다면 우리는 죄를 겉만 번지르르 한 삶으로 덮어 버리려고 하지 말고 회개하고 주님께 가서 자비를 청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지워 주시기를 청해야 합니다. 우리가 청하고 주님께 다가가면 오늘 화답송의 후렴과 같이 주님께서는 우리 위에 당신 얼굴 밝은 빛을 비추어 주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