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방문 축일을 지내며 성모님과 엘리사벳의 만남을 묵상합니다. 그 만남이 얼마나 기쁜 만남이었는지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기쁨이 엘리사벳의 배속에 있던 요한에게도 전달되어 즐거워 뛰어 놀았다고 합니다.
우리의 만남도 그렇게 즐겁고 기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형제 자매들의 목소리를 듣고 바로 기쁨으로 마음이 가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사랑이 가득한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기쁘고 즐겁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목소리만 들어도 짜증이 나고 보고싶지 않습니다. 다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때로는 반가운 척할 때도 있지만, 필요에 의해서 비치는 겉모습일 뿐 마음은 미움으로 가득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모님과 엘리사벳,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충만한 기쁨이 어디에서 오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단순히 그들의 만남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들 가운데 계신 예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성모님이 예수님을 잉태하기 전에 방문을 했다면 아마 그 만남의 모습은 다르지 않았을까요?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인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마리아의 인사만 들었다면 반가웠을 것이지만 같은 기쁨은 아니었을 것이고, 태중에 있던 세례자 요한도 메시아와 만남이 없었기 때문에 즐거워하며 뛰어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계신 것이,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형제 자매들을 대하는 것이 얼마나 그리스도인의 삶에 중요한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항상 우리 밖에서만 찾으려고 합니다. 물질적인 것이나 오락이나 여행이나 다른 사람이든지 외적인 것을 바라봅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잠시 즐겁고 기쁘게 해 줄 수 있지만 우리의 영혼을 진정한 기쁨으로 채울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를 창조하시고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기쁨, 성모님과 엘리사벳과 세례자 요한이 누린 기쁨이 우리 삶을 채우기 위해서 이미 우리와 함께 계신 분, 우리 안에 계신 분이 내 삶에 중심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자신이 원하는 것 만이 기쁨이 된다고 믿으며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메시아를 품었던 것과 같이, 우리도 이미 예수님을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먼 곳에 계신 것도 아니고 바로 우리 안에 계신데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밖으로만 돈다면 어떻게 우리의 삶이 진정한 기쁨으로 채워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형제 자매들과 만남이 기쁨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떠한 만남이든지 예수님께서 중심이 된다면 그 만남은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스바니야 예언서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기뻐하시며 당신을 통해서 우리가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 나에게 닥친 상황이 좋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습니다. 또 나를 찾아온 사람이 내게 잘해주는 사람이든 상처를 주고 나쁘게 했던 사람이든 상관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그러한 것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삶이 고통스럽더라도, 성인들과 순교자들이 보여준 모습대로 기쁨이 떠나지 않는 것은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것도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먼저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기도한다고 하는 하루 시간 중에 일 부분만이 아니라 매순간 예수님을 모든 사람들, 모든 일에서 만나야 합니다. 그러한 만남이 우리를 찾아오는 이웃의 목소리에서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할 것이고, 그 만남을 충만한 기쁨으로 주님께서는 채워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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