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3일 – 제 24주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한번 어떤 신부님이 죽어가는 사람의 고해성사를 들으러 갔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신부님은 그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다 뉘우쳤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신부님이 다른 사람들을 다 용서하느냐고 물어보자 그 사람은 그렇게 못한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슬퍼 하며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용서해주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냥 가볍게 듣고 넘길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아주 중요하고 꼭 기억해야할 말입니다.  예수님도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집회서에서도 “복수하는 자는 주님의 복수를 만나게 되리라. 그분께서는 그의 죄악을 염격히 헤아리시리라” 고 말합니다.  용서하지 않는 죄는 하느님께서 그냥 넘어가지 않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분노를 마음에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분노를 마음에 담아둘 때 어떻게 그것이 드러나는지 지금 세상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온 세계 모든 사람들이 겪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모두가 함께 힘을 합쳐 이겨 낼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세상을 보면 오히려 사람들이 자신들의 분노를 표출하는 때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는 끊임없이 폭동이 일어나고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도 여기저기서 거의 매일 총기로 서로를 죽이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그런 식으로 마음의 분노를 표현하지는 않겠지만, 용서하지 않고 분노하는 마음의 모습에는 별 다를 것이 없는 것이지요.

교황님의 이야기에서 죽음의 순간에도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의 모습에 슬퍼한 신부님과 같이, 주님께서 이 모습들을 보시고 얼마나 슬퍼하실 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용서하지 못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도저히 값을 수 없는 액수를 빚진 이의 빚을 자비로 탕감해준 임금과 같이 우리가 값을 수 없는 빚을 탕감해 주시는데, 우리는 나가서 탕감을 받은 종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고, 값지 못한다고, 나에게 잘 못했다고 분노에 차 마음으로 형제 자매들을 죽이고 때로는 복수하며 마음에 평화를 잃고 살아 갑니다.

집회서의 말씀대로 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리고, 파멸과 죽음을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중요한 계명인 사랑하라는 계명에 충실해야 하는데, 지금 내가 당한일만 생각하고 바라보고 있으니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를 그 사람들이 나에게 한 잘못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러 이러 한 일로 내게 큰 상처를 줬기 때문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지요.  맞습니다, 그 잘못만 바라보고 있으면 용서 못합니다.  복음에 임금도 자기가 받지 못할 돈만 계산하고 있었다면 탕감해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값지도 못할 거면서, 뻔뻔하게 시간을 더 달라고 하는 모습을 보고 더욱 분노했겠지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삶의 모든 것이 정의와 법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특히 악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은총의 삶이 다시 시작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이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악은 복수를 할 줄 알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용서와 사랑으로 끊어내지 않으면 악이 퍼지도록, 세상의 숨을 막도록 두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되 값지 않고 용서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이만하면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 이상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임금이 큰 빚을 진 종의 빚을 탕감해주는 것은 누가 봐도 필요 이상의 행동이고 사랑입니다.  종에게 그런 사랑을 베풀지 않아도 세상 누구도 임금이 잘못했다고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도 하느님께서 안 해도 되는 필요 이상의 사랑인 것입니다.  남들 하는 만큼 만하고서는 이웃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특히 남들 하는 만큼만 하는 것은 복수하는 것이지 용서라는 단어는 찾아보기 힘들지요.

형제의 잘못을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하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일흔일곱 번 까지라 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노트에 몇 번이나 용서했는지 적어서 나중에 하늘나라 문에 들어갈 때 제출하라는 말씀은 아니지요.  제한 없이 언제나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이고 듣는 이들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가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살고 나의 삶은 내 것이라고 믿는 다면 불가능하겠지요.  단 한 번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주님의 것이 될 때 그 은총으로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이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지요.  주님께서 용서를 청하는 우리를 끊임없이 용서하시듯이 그 은총안에서 우리도 형제 자매들을 제한 없이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서 언제라도 어떠한 상황이라도 그렇게 용서하는 것이, 필요 이상으로 사랑하는 것이 쉽다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내가 해야 하는 일들 중에서 가장 힘든 일 일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쉬워서 십자가에서 못박히지 않았습니다.  내가 형제 자매의 잘못만 바라보며 용서하려고 하지 않으면 주님의 은총도 우리가 용서하도록 만들지 못합니다.  하지만 내가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열려 있다면 우리는 주님을 통해서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프고 화가 나서 당장은 불가능해 보인다고 해도 절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웃의 잘못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자비의 은총에 초점을 두고 내가 복수와 미움보다 사랑을 선택하며 내가 겪은 악이 사랑에 의해서 끊어지고 더 이상 세상에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한주동안 우리모두 내가 지금 용서하지 못하는 형제 자매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특히 자신들을 죽이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용서한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순교자 성 월에,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 하시듯이 우리 에게도 형제 자매들을 용서할 수 있는 용기의 은총을 주시기를 아버지께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