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8일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항상 중요한 말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고 때로는 쓸데없는 말들도 많지요.  물론 말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말하는 것 또한 항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쓸데없이 중요하지 않은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사람들 과의 관계에서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도 기도한다고 하면서 쓸데없는 말, 빈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절대 말이 많다고 그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말을 얼마만큼 하던지 나의 기도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매일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합니다.  물론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그동안 대화의 대상은 한정되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전을 생각해 보면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했을 것이고 그 중에는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 친구 들과의 대화, 안면이 있는 사람들과 인사 정도의 대화, 그리고 가게에서 손님이나 아니면 내가 무엇을 사러 갔을 때 거래를 위한 필요에 의한 대화 등이 있습니다.  먼저 기도는 거래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주인이고, 내가 대가를 치르고 필요한 것을 가서 얻어내는 거래가 아닌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만, 꼭 도움이 필요할 때만 하느님을 찾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느님을 그저 안면이 있는 사람으로 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별로 관계는 맺고 싶지 않지만 예의상 아는 척을 하는 것이지요.  그냥 가끔 생각날 때 마다 기도하는 모습이 그런 것이 아닐까요?  기도는 적어도 가까운 친구와의 대화, 더 나아가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과의 대화는 서로와의 관계를 위한 것이지 무엇을 얻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기도는 하느님과의 거래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유지해 나가며 깊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카톨릭 교회 교리서 #2558 에서는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신비는 위대하다.” 교회는 사도신경에서 신앙의 신비를 고백하며(제1편), 성사 전례 중에 이를 거행하여(제2편), 신자들의 삶이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일치하도록 한다(제3편). 그러므로 신자들은 이 신비를 믿고 거행하며, 또한 살아 계시는 참하느님과 맺는 생생하고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이 신비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 관계가 바로 기도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가르쳐 주시는 기도는 사랑으로 필요한 것을 주시며 돌보시고 죄를 용서하시며 영원한 삶으로 이끄시는 아버지와, 그러한 아버지께 의지하는 자녀들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집회서의 말씀은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가 얼마나 대단한 예언자들이었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위대함은 스스로의 것도 아니고, 하느님과 거래를 해서 얻어 낸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예언자로서 주님의 일을 한 것은 기계처럼 시키는 일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의 예언자로서 주님과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 관계 안에서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느님의 위대한 기적들을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떠한 관계 인지, 나의 기도는 어떠한 기도인지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가 되도록 하셨고, 당신의 희생으로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는 사랑의 대화, 아버지와의 관계는 더 없는 사랑의 관계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항상 거기에 장애물을 놓는 것은 우리들입니다.

그 장애물은 각자 다를 것입니다.  물질적인 욕심, 이웃을 향한 미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등, 내 삶을 잘 돌아보고 내가 아버지와 생생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데 장애물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돌아서서 단 1분을 기도해도 그 기도가 진정한 사랑의 대화가 될 수 있도록 예수님께 서 가르쳐 주신 기도대로 아버지께 모든 것을 의지 하는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