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3일

우리는 당연히 지켜야 하는 법과 질서가 있지만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해서 예전과 같은 자유로움은 누리지 못합니다.  임시로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게 하는 법과 벌금 등으로 바이러스가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사람들의 협조를 요청하는 한편 강제성이 있기는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한 부분이 아닌 바이러스로 인해서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셨을 때 완전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물론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는 따먹지 말라고 했지만 그들이 뱀의 유혹에 의해서 따 먹었듯이 그들의 손을 묶어서 따먹지 못하게 막은 것이 아니지요.  그 또한 사람에게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는 세상의 어떤 사람도, 어떤 것도 억압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외적인 자유가 아니라 내적인 자유이기 때문이지요.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의 예를 보면 몸은 수용소에 갇혀서 억압되어 있었지만,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 사랑은, 그 내적인 자유는 억압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사랑안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렸던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갈라티아서 말씀에서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 삶을 버리고 자신의 선택으로 죄의 종살이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는 외적인 자유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내적인 자유를 억압합니다.  죄는 그 자유를 보장하시는 하느님과 떨어트리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종살이의 멍에를 메는 것이지요.  죄의 사슬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보고 채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를 내 던지며 내가 스스로 차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는 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믿음으로, 사랑으로 행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사랑하지 않을 때 그것을 다른 이들의 잘못으로 정당화시킵니다.  저 사람이 내게 잘못했고, 뉘우치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토대가 되는 사랑은 형제 자매가 먼저 사랑하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냥 용서할 것이 있으면 용서하고, 모자라는 것이 있으면 채워주며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해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내 내적 자유를 억압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모습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겉 모습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람들의 눈에는 바르게 보이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실 그들의 마음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한 것입니다.  사랑을 선택하지 않아서 생긴 마음안의 사랑이 빈 자리에 무엇이 들어가겠습니까?  악함과 죄 밖에는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사회에서 힘이 있고 존경받으며 그 사회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누리는 것 같았지만, 사실 그것은 겉 모습일 뿐,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죄의 사슬에 묶여 종살이의 멍에를 메고 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유를 주셨는데, 스스로 억매이는 종이 되겠다고 하니 얼마나 어리석은 것일 까요?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자유롭게 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참된 자유는 그분 안에 머물며 마음으로 자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이 믿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면 절대 죄의 무게에 눌려 억압받는 삶을 살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매일 하루를 시작하면서 마음을 열고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또 하루를 마치며 돌아보고 사랑하지 못한 순간들을 뉘우치며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삶을 살아 갈 때 우리는 주님의 사랑안에서 그분의 뜻대로 마음에서 부터 행동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